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단고기/고증적 비판 (문단 편집) == 모순에 빠진 내용 == 환단고기가 크게 네 개의 문헌을 취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가장 분량이 많은 태백일사는 오만 잡다한 기록들을 조금씩 가져다 묶어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그 내용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기 십상이다. 예컨대 단군조선에 대한 내용은 단군세기만이 아니라 삼성기 전 상편,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도 흩어져 있고 특히 단군왕검에 대한 내용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도 한 마디 거들고 있다.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라는 하나의 책 안에서도 '''기록이 엇갈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환국의 위치와 같은 경우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국이 [[만주]]에 있었다고 하면서 환웅은 그 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삼성기 하편과 태백일사에서는 [[바이칼호]](天海)의 동쪽으로 시베리아 중앙 고원이나 [[파미르기원설|천산산맥]](天山) 혹은 [[파미르기원설|파미르고원]](波奈留山) 부근을 환국이 있던 자리라 가리키고 있다.[* 대부분 환단고기 역자들이 저지르는 실수인데, 정작 이유립은 천산(파나류산)을 시베리아 중앙 고원으로 정의했다. 여기에서 '파나류(波奈留)'가 우리말 '하늘'의 일본어 음차라는 것은 해동역사 제28권 방언조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실렸다. 즉 파내류산은 뜻으로 쓰면 천산, 음으로 쓰면 하늘산이라는 것이다. 덧붙여 환국을 파내류국이라고도 했으니 환국=하늘국으로 환=하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다만 이걸 한국이라고 읽지 않음은 위 문단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추가로 태백일사에서는 '환'을 가리켜 광명이라 말하는 대목이 따로 있다.] 또 환웅은 여기에서 별도의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아래 만주 땅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부싯돌의 최초 발명에 대해서도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인이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규원사화]]를 따라 환웅 초기 고시례가 부싯돌을 발명했다고 서술되었다. 거기다가 그토록 중요한 [[치우]]의 행적에 대해서도 환단고기 안에서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성기 하편에서는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하지만, 태백일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틀어막는 선에서 그쳤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여기에 이미 전에 함락시켰던 탁록을 함락시키고, 또 함락시키고, 다시 함락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마한세가의 기록에선 치우가 전군을 탁록에 집결시킨 상황에서 헌원에게 경고서한을 보내자 헌원이 항복한다. ||<#dcdcdc> 삼성기 전 하편 ||<#dcdcdc> 태백일사 신시본기 ||<#dcdcdc>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 ||<^|1>① 염농(炎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후(軒侯)가 등장하자 탁록에서 __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__{{{#!html (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br]② 이때 탁(涿)을 중심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북쪽에는 대요(大撓), 동쪽에는 창힐(倉頡), 서로는 헌원(軒轅)이 있었는데, 헌원이 치우에게 밀려 대요와 창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두 나라는 모두 치우를 섬기고 있었음. ||<^|1>③ 유망(楡罔)의 정치가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탁록을 함락하고 연전연승.{{{#!html (탁록전 1)}}} 유망이 소호(少昊)을 보내서 치우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달아남. 치우는 유망의 수도 공상(空桑)을 접수하고 다시 탁록을 포위해서 이들을 멸망시킴.{{{#!html (탁록전 2)}}}[br]이 소식을 들은 공손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는 자신에게 항복한 소호를 보내서 탁록을 포위하고 헌원군을 멸망시킴.{{{#!html (탁록전 3)}}} 그럼에도 근성가이 헌원이 굴하지 않고 계속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가 직접 탁록의 유웅(有熊)벌에서 헌원군을 몰살시킴.{{{#!html (탁록전 4)}}} 기(冀)·연(兗)·회(淮)·대(岱)의 땅을 모두 점거하여,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침.[br]④ 치우가 더욱 군대를 정비한 뒤 진군하여 10년 동안 헌원과 73회를 싸웠지만, 근성가이 헌원은 오히려 각종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계속 치우에게 도전. 이에 열받은 치우가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밟아버리겠다면서 헌원과 결전을 치루는데, 여기서 그만 [[치우비]](蚩尤飛)가 죽었음. 환단고기 세계관에서 헌원이 죽였다는 치우는 사실 이 치우비라 이야기함.{{{#!html (탁록전 5)}}}[br]이에 치우는 분노하여 최첨단 무기인 투석기를 가져다가 헌원에게 크게 공격했고,{{{#!html (탁록전 6)}}} 이에 군대를 보내서 서쪽으로 예(芮)·탁(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 회(淮)·대(岱)에 성을 쌓아 __헌원의 침공를 봉쇄함.__{{{#!html (결과B)}}}[br]① 신농(神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원(軒轅)이 등장하자 탁록에서 __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__{{{#!html (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1>⑤ 헌구(軒丘)가 복종하지 않자 치우가 정벌하여 탁록(涿鹿)에서 대결. 싸우기 전 치우의 형상을 드러내보이고 격문을 지어 헌원을 꾸짖으니, __이에 헌구가 곧 평정되어 복종함.__{{{#!html (결과 C)}}}|| 그리고 태백일사에서는 22대 단군인 색불루가 단군 자리를 선위받으면서 종래 고조선 내의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편했다고 나오는데, 단군세기에서는 그보다 한참이 지난 44대 단군 구물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뒤 진한을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었다고 나온다. 일단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색불루의 삼조선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구물에 이르러서야 삼조선이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이것마저 불완전하다고 기록되어있다.[* 사실 신채호가 20대에는 기원전 15~14세기에 고등(高登)으로부터 부여라는 이름이 시작된다고 하였고, 30대에는 이걸 취소하고 기원전 4세기에 삼조선이 분립했다고 하였는데, 환단고기에선 이 둘을 모두 가져다 쓰다 보니 생긴 문제다.] 이 가운데 백미는 단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번한세가 상편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도산회의의 결과로 낭야성에 감우소(監虞所)를 두고 뒤에 번한을 세워서 감우소의 정무를 맡겼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의 2대 번한인 낭야 시절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치우 관련 기록들처럼 여러 부분에 흩어진 게 아니라 한 기록 안에서 나타난다. ||<|2><#dcdcdc> 단군세기 ||||<#dcdcdc>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 ||<#dcdcdc> A ||<#dcdcdc> B || ||<^|1>단군왕검 67년에 태자 부루를 보내서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우순(虞舜)과 국경을 정해 유주와 영주가 조선에 귀속되고, 회(淮)·대(岱)에는 우순에게 통치가 위임된 분조(分朝)를 둠.||<^|1>9년 간 홍수가 일어나자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를 보내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이에 낭야성(琅耶城)에 감우소(監虞所)를 두어 구려(九黎)를 분정(分政)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초대 번한으로 삼음.||<^|1>2대 번한 낭야가 낭야성(琅邪城)을 쌓음.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가다가 이 낭야성에 머물러 민생을 살핌. 이후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에서 치수법을 전수.|| ||||||<#aaf782> 도산회의 개최 → 구려분정 → 초대 번한 책봉 → 2대 번한 세습 → 낭야성 축성 → 도산회의 개최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